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근본적인 발발 원인 ===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벨 에포크|유럽에서 전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는 안정된 정세]]가 조성된 덕분에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얻고 생산된 상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필요하게 되어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대영제국|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엠스 전보 사건]]과 [[보불전쟁]]을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세계 정책|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 땅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다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제국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 [[독일 식민제국]] 또한 [[중화민국 북양정부|중국]]의 [[칭다오]], [[아프리카]]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독일령 동아프리카|탄자니아]], [[카메룬]], [[토고]], 남태평양의 비스마르크 제도 등 식민지들을 꽤 확보했지만,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면 밀리는 수준이었다.] 범게르만주의로 탄생한 국가가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은 독일인들에게 강대국의 국력에 걸맞은 식민지를 바라게 만들었다. 쉽게 말해 열강들이 자국 산업을 펌핑하기 위해 체급을 키우다보니, 그렇게 불려둔 공장을 돌리기 위해 원자재가, 그를 가공한 상품을 팔 시장이 필요했다.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진 레드오션이 되었으니 누군가는 파산을 해야 하는데, '내가 가격경쟁력 떨어지니 장사 접어야겠다' 대신 '경쟁사 공장 애들을 싸그리 죽여버리면 내 공장은 멀쩡하겠지?!' 라는 사고방식이 식민지 쟁탈전이 극심하게 되는 데 큰 지분을 차지했다. 특히 [[빌헬름 2세]]는 식민지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해양 패권에 민감하던 영국의 신경을 크게 건드렸다. [[윈스턴 처칠]]은 영독 관계에서 함대란, 영프 관계에서의 [[알자스-로렌]]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고,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https://en.wikipedia.org/wiki/Paul_Wolff_Metternich|파울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Paul Graf Wolff Metternich zur Gracht)도 해군을 증강하면 1915년 이전에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해서 해군 증강을 반대한 메테르니히를 1912년에 해임해 버렸다. 건함 경쟁은 영국과 독일을 적대관계로 만들었으며 세계 대전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미 제1차 대전 이전에도 독일 제국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 전쟁]] 당시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 제국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위기]]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다민족 국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내부적으로는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요민족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들은 인구 구성의 반도 안 되었으나 다른 민족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너무 많은 이권을 가졌다는 것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외적으로도 안 좋았는데 독일 제국과 함께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는 국가로서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에 맞서 [[발칸 반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게 되었는데, 독립 이후 발칸 반도의 각국은 [[발칸 전쟁]] 등 영토를 놓고 치열하게 싸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나라는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1878년]], [[1908년]])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 왕국(1882년~1918년)|세르비아 왕국]]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마침내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제1차 대전이 발발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암살자 프린치프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사형은 면하고 2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수감 중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왕국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반오스트리아 활동 해체, 사라예보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세르비아 내 재판 개입 등을 요구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이를 거부하면서 [[세르비아 침공|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이에 대해 독일 제국의 지원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 역시 예견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당시의 오스트리아 외교관의 회고록을 보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한 [[최후통첩]]을 일부러 받아들이기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긴박한 1달의 일련의 사태를 아래에서도 설명하듯 [[7월 위기]]라고 한다. 이 전쟁이 세계 대전으로 번진 진짜 원인은 [[러시아 제국]]이 영-불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그래서 명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노련한 감각으로 유지하던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간의 삼각동맹 체제를 [[빌헬름 2세]]가 파기해 버린 것이 독일 제국의 결정적 실책으로 꼽힌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이 동맹을 맺어 포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이가 좋지 않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을 잘 구워삶아 삼각동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 즉위 후, 비스마르크를 강제로 은퇴시키고 외교체제를 개편하면서 러시아를 버리고 오헝제국을 유일한 동맹 파트너로 선택한다.[* 다만 비스마르크 체제에서도 이미 반프 친러정책은 붕괴되고 있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민속놀이인 유럽에서 '다같이 친하게 지내자 쎄쎄쎄!' 가 잘 될리 없었다. 쉽게 말해 오스트리아랑 러시아가 으르릉거리는 상황에서 독일이 둘이 친하게 지내자고 해봤자 통할리가 없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주었고, 오스만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발칸 주도권을 강탈해 오스트리아에게 넘겨준다. 당연히 러시아는 격분했고, 비스마르크가 아무리 혓바닥을 놀려봤자였다.] 이에 러시아는 당연히 서로 고립된 프랑스와 [[1894년]]에 [[러불동맹]]을 체결하며,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심지어 이 [[제2차 세계 대전|다음 전쟁]]에서도 그랬다.] 영국 역시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가 충분히 약화되었다고 보고 [[1907년]] [[영러협상]]을 체결한다.[* 원래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별 짓을 다했는데 이를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크림전쟁]], [[거문도 점령 사건]], [[러일전쟁]]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는 러일전쟁 와중에 [[쓰시마 해전|러시아 발트함대가 일본에게 작살난 덕분이었다]]. 본토방위를 우선으로 하는 영국으로선 발트함대 잃은 러시아, [[청년학파]]라는 뻘짓을 하며 자국 해군을 조진 프랑스는 가상적국으로 밀려났고, 2위 해군국이 되어버린 독일을 견제하는 게 당연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이러한 전략적 약점을 전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먼저 프랑스를 치고 나중에 러시아를 손본다!"는 [[슐리펜 계획]]을 구상한다. 결국 슐리펜 계획 자체가 1차 대전 개전 원인의 일부가 됐으니 1차 대전 개전의 가장 큰 책임은 독일의 빌헬름 2세에게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1차 세계 대전의 가장 큰 책임은 독일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게 있다는 것이 오늘날 역사가들의 입장이다. 즉, 1차 세계 대전은 각국의 이익의 충돌로 인해서 벌어진 전쟁이며, 특히 발칸 반도 내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러시아와 발칸반도의 영향력을 지키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갈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같은 경우 당시 대통령이었던 [[레몽 푸앵카레]]와 외무 장관이었던 [[https://ko.wikipedia.org/wiki/%ED%85%8C%EC%98%A4%ED%95%84_%EB%8D%B8%EC%B9%B4%EC%84%B8|테오필 델카세]]가 반독감정을 이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불전쟁의 굴욕 이후 프랑스는 일관적인 반독정서가 지배했고, 당연히 정치인들도 반독코인에 탑승했다) 러시아는 당시 [[로마노프 왕조]]가 쇠퇴기를 걷고 있었으며,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활동했던 시기와 겹친다. 이러한 사정 등으로 국내 사정이 불안한 상태였는데 이걸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타켓을 찾던 러시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며(자국 정치의 혼란을 내정개혁보다는 대외적 성과, 그러니까 국뽕으로 해결하려는 건 동서고금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프랑스 대통령을 초청하거나 총동원령을 내려서 독일을 자극시켰다. 프랑스 역시 이러한 것을 이용하여 독일에 대한 복수심으로 뒤에서 전쟁을 부추겼다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영국 역시 본인들이 직접 나서서 개입한다면 단순 갈등이나 국지전으로 끝났을 이 전쟁이 영국의 관망 정책 즉 영광의 고립 정책으로 인해서 개입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전쟁은 단순히 특정 인물과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유럽 내의 거의 모든 나라들의 책임으로 봐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